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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조선 10대 왕: 연산군] 성군? 무오사화, 장녹수, 갑자사화(사람으로 젖갈을)

by 작심인프피:) 2024. 5. 21.

안녕하세요. 작심인프피:)입니다.

오늘은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끌려내려 온 왕이었던 자,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자 시절 큰 존재감이 없고 즉위 후 몇 년간은 성군의 소리를 듣던 연산군이었습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 재위시절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장녹수를 사랑했던 그, 천명의 궁녀와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폭군의 만행을 저지르다가 신하들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영화(간신)

연산군

1. 생애: 1476년~1506년

2. 재위기간: 1494년~1506년

3. 휘: 이융

4. 묘호: 없음(폐위되어 연산군으로 강등됨)
4. 자녀: 왕비(폐비 신씨), 후궁 3명(숙의 이씨, 장녹수, (미상)), 자녀(4남 2녀)

 

1. 평범했던 연산군

 폐비 윤씨가 죽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6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실의 가족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많이 외로웠겠죠.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지만 성종의 적장자로 세자에 올라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1494년 왕이 되고 1504년 폐비 윤씨의 복수극이 시작되기 전까지 연산군은 평범한 왕이었습니다. 연산군 시절에는 큰 혼란도 없었지요. 유일한 것이 홍길동의 난(1500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즉위 초반 성종의 묘지문을 보다가 어머니의 일에 대해 알게 됩니다. 과연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2. 무오사화

 조선시대, 모두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납니다. 사화란 조선의 신진 관료 세력인 '사림파'가 보수 관료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연산군 재위 시절 총 2차례의 사화가 일어납니다.

 '무오사화'는 실록을 만들기 위한 역사기록인 사초가 계기가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림파 사관이 성종실록의 사초에 실었다는 사실을 훈구대신이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입니다. 
 김종직이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꿈속에는 중국의 의제(항우에게 죽임을 당한)가 슬픈 얼굴로 나왔다고 합니다. 항우는 황제였던 의제를 죽이고 시체를 물에 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김종직이 꿈을 꾼 시기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로 증조할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은 곧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 연산군 또한 사림파를 견제하고 있었기에 훈구파와 연산군이 눈이 맞게 됩니다. 
 따라서, 많은 사림파 관료들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당사자 김종직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부관참시란 관을 절단하고, 시신을 다시 벤다는 뜻입니다.

 

3. 폭군이 된 연산군

 연산군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궁궐 안에 '사냥개'를 많이 길러서 나랏일을 논의할 때에도 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궁궐 주변의 집을 허물기도 하고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궁궐을 내려다보지 못하게 막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임금을 내려다보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신하들에게 '신언패'를 차게 했습니다. 신언패란 '말을 삼가라'라고 적힌 패입니다. 즉, 신하들에게 '말 조심해, 안 그럼 죽는다.'라고 경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상한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으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4. 장녹수 

 연산군에게는 어질고 현명한 중전이 있었지만, 장녹수를 더 아끼고 총애합니다. 실록은 장녹수의 외모는 평범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신 30대이지만 16세와 같다고 한 거로 보아, 엄청난 동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장녹수는 연산군을 어린아이 대하듯 다루기도 하며 노예처럼 다루기도 했다고 해요. 연산군은 화가 나있다가도 장녹수를 보면 웃음꽃을 피웠다고 해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연산군의 마음을 훔쳤을까요?

 

5. 갑자사화

 연산군은 사이코패스였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초반에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한다면 이를 핑계로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 있는 신하들을 처단하고자 다짐합니다. 
 그러다, 1504년 갑자년이 찾아옵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와 관련된 신하들을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한 그룹
 -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그룹
 - 어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말린 그룹
 어머니의 죽음을 말린 신하들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즉,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하고 방관하는 자들이 현재 연산군의 주변에 남아있는 것이죠. 이런 가운데 성종 때 신하이자 대간활동을 하던 사림파 학자들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점점 죽음과 학살에 무뎌진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앞장섰던 후궁 엄씨와 정씨를 부릅니다. 어찌 보면 이들은 연산군의 의붓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검정두건으로 뒤집어씌우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린 뒤, 그녀들의 자식들을 불러 역적이라 하면 처단하라고 합니다. 자식들은 자기 어머니인 줄 모르고 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신으로 젖갈을 담그리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 야사에 보면 연산군은 할머니 소혜왕후를 찾아가 자기 어머니를 죽음에 몰게 했다며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패륜적인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6. 천명의 기생, 향락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 관리인 '채홍준사'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천명을 기생을 두어, 그중 재주만 뛰어나면 '운평'이라 부르고 재주뿐만 아니라 미모가 아름다운 기생은 '흥청'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을 세조가 세운 원각사에 수용하고 국고가 텅텅 비어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이르도록 놀이를 즐기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합니다. 
 또한 학문을 연구하는 성균관의 대성전을 동물원으로 만듭니다. 동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냥을 위해서였습니다.


7. 연산군의 마지막

 연산군의 폭정은 멈출 줄 모릅니다. 이에 연산군을 보필하던 신하들도 포기해 버렸답니다. 그에게 마지막 신하는 내시 김처선이었습니다. 끝까지 연산군을 모시던 김처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산군에게 간언을 합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팔, 다리를 자르고 활로 쏴 죽입니다. 
 더는 이러한 폭정을 참을 수 없던 신하들은 반정을 일으켰고, 결국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 2개월 뒤에 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바로...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민 연산군의 아내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