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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조선 9대 왕: 성종] 계승 서열 3위? 수렴청정, 경국대전 왕성, 폐비 윤씨

by 작심인프피:) 2024. 4. 23.

안녕하세요. 작심인프피:)입니다.
오늘은 단명한 예종의 뒤를 이은 왕 성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종은 계승 서열 3위였지만 어머니의 외가댁 한명회의 힘에 의해 왕이 됩니다. 그 이후 할머니로부터 수렴청정기간을 거치고 조선의 정치제도의 기틀이 된 경국대전을 완성하게 되죠. 또한 후궁이 많아 질투하던 폐비 윤씨를 왕비로 두었던 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성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종 어진(상상)


성종생애: 1457년~1494년
재위기간: 1469년~1494년
휘: 이혈
가족관계: 왕비:3명(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우 윤씨), 후궁 9명, 자녀:16남 12녀(연산군, 중종)

1. 계승 서열 3위가 왕이 된다?

성종은 예종의 조카입니다. 예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다음 왕을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종이 당시 한명회의 사위라서 왕위에 올랐다고 알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 영향은 있었겠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종의 하나뿐인 아들 제안대군이 계승 서열 1위였지만, 3살로 나이가 너무 어려 탈락합니다. 그리고 예종의 형 덕종의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월산대군(첫째-서열 2위)과 자을산군(둘째-서열 3위)이었죠. 덕종은 세자로 책봉되지 않아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월산대군과 성종 중 한 명을 예종의 양자로 들여 왕위에 즉위시켜야 하는데, 유교적으로 적장자인 원산대군을 대신해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즉위시키게 됩니다. 물론 원산대군은 몸이 약하기도 했습니다.

2. 7년 간의 수렴청정

 성종이 즉위할 당시,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수렴청정이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때까지 일정 기간 왕실 여인이 국정을 대리로 처리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정치할 수 있는 발판을 잘 마련하는 역할에 충실합니다.

 먼저, 성종이 열심히 유학 공부에 힘쓸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경연'이라고 합니다. 성종은 25년의 재위기간 동안 경연을 9229회가량 참여합니다. 이는 연편균 369회에 달합니다. 즉,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또한, 왕실에 성종을 보필할 여인이 정희왕후뿐 아니라 성종의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예종의 부인),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가 있습니다. 여기서 안순왕후와 소혜왕후의 서열이 살짝 애매해집니다. 이전 왕의 부인과 현재 왕의 부인, 어떻게 보면 이전 왕이 요절했기에 여전히 서열을 높이 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희왕후는 안순왕후 말고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를 인수대비로 정하게 됩니다. 이는 성종이 좀 더 편안한 상황과 마음으로 왕의 역할에 충실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정희왕후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3. 성종의 업적(홍문관 설치, 유향소의 부활, 사림의 등용, 경국대전의 완성)

1) 홍문관 설치

 세조는 경연을 폐지했었습니다. 이를 성종 때 다시 부활시킵니다. 성종은 상당한 공부벌레였다고 하는데요. 경연을 매일 참여했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홍문관이라는 왕의 자문기구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을 설치합니다.

2) 유향소의 부활

 세조가 없앴던 유향소도 부활시킵니다. 유향소는 지방 사족들의 모임기구로 수령을 보좌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수령을 감시하며 유향소의 힘이 세지자 세조는 이를 폐지했던 것이죠. 그러나 성종 시절의 신진세력(사림)들은 유향소를 통해 지방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져 유향소가 부활됩니다.

3) 사림의 등용 

 성종은 당시의 집권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신진세력, 사림파를 기용합니다. 

? 훈구파,?? 사림파
-훈구파란 급진파 사대부를 부르는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방원이 있죠. 이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이바지했기에 마땅히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훈구파'라고 일컬었습니다. 
-사림파란 온건파 사대부를 부르는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정몽주가 있죠. 이들은 급진파 사대부에 밀려 지방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성종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점점 힘이 세지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게 됩니다.

4) 악학궤범 편찬

 공자는 인간 완성의 최고의 방법을 '예술'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유학이 발전된 왕 대에는 음악이 발전됩니다. 성종 또한 음악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믿어 세종 때부터 준비한 악학궤범을 완성시킵니다. 악학궤범은 악전, 궁중음악과 당악, 향악에 관한 이론 및 제도, 법식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5) 경국대전

 세조 때부터 준비해 온 법전을 성종 때 완성하게 됩니다. 경국대전은 참으로 정교한 법전이라고 합니다. '형전'에는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에는 매매 및 사유권에 대해 절대 보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우리의 고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질투의 화신 폐비 윤씨

 성종은 후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9명이나 되었거든요. 왕비는 3명이었습니다. 첫 번째 왕비는 일찍 죽었기에 후궁이었던 윤씨가 성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됩니다. 보통은 후궁 중에서 왕비를 들이지 않고 양갓집 규수를 새로 들이는 경우가 많은 데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윤씨가 후궁에서 왕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수대비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는 학문에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 않았는데, 윤씨는 인수대비에게 살갑게 잘 대하고 성종의 아이까지 출산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연산군이지요. 무튼 그러했기에 "새로운 중전을 드리지 말고, 윤씨를 중전으로 맞이합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전이 되자마자 윤씨는 본색을 드러내게 되죠.

 윤씨는 질투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윤씨가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가 궁에 울려 퍼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약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굿하는 방법의 서책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야사에는 성종을 얼굴을 할퀴기도 하며 노예처럼 대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3년 만에 윤씨는 폐서인이 됩니다. 그리고 3년 뒤 사약을 먹고 죽게 되죠. 

 

마무리

승계 서열 3위였던 성종의 재위기간은 폐비 윤씨를 제외하고 무난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을 보호해 줄 안전한 왕권세력이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할머니 정희왕후부터 자신의 어머니 소혜왕후까지 이러한 안전한 테두리 속에서 빛을 발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