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심인프피:)입니다. 오늘은 조선의 11번째 왕인 중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진 개혁을 원하는 조광조를 믿고 따르던 중종, 하지만 기묘사화로 버려지는 조광조. 사실 중종의 이야기보다는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중종
생애: 1488년~1544년
재위기간: 1506년~1544년
휘: 이역
가족관계: 아버지(성종), 어머니(정현왕후 윤씨), 배우자(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12대 인종, 문정왕후 윤씨-13대 명종, 9명의 후궁-덕흥대원군-14대 선조
1. 바지임금 중종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소리조차 숨기며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정으로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을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납니다. 그의 나이 19세에 중종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왕위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하들에 의한 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바지임금이 된 것이죠.
또한, 중종은 자신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정을 일으키기 전, 그녀의 아버지에게 함께하자고 하지만 그는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따라서, 단경왕후는 궁궐에서 쫓겨났으며 경회루와 마주한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펼쳐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왕산의 '치마바위 전설'입니다.
2. 조광조
반정을 일으킨 반원종, 유순정, 성희안은 하늘이 정해놓은 운명을 피해 갈 순 없었습니다. 모두들 나이와 병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그렇게 중종 10년이 된 시절, 어느덧 나이가 30에 가까워진 중종은 더 이상 바지임금이 아니라 진정한 임금으로 거듭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필할 인물인 조광조를 만나게 됩니다.
조광조는 빠르게 승진을 하며 중종에게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가'였습니다. 또한 '사림파'의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 잡게 되죠. 그가 행한 업적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소격서 폐지
훈구파는 비교적 타 종교,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림파는 폐쇄적이었습니다. 조선의 관청 중에 '소격서'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도교와 관련한 제사와 의식을 행사는 기관이었습니다. 도교는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로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검소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였습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조광조는 소격서를 폐지하고자 했으며, 다른 성리학자들에게까지 퍼지며 결국 소격서는 폐지됩니다.
2) 향약 보급
향약이란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입니다. 지방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자치규약으로 만들어짐과 동시에 사림의 영향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조광조는 중국의 [여씨향약]을 덕업상권(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과실상규(잘못은 서로 바로잡고), 예속상교(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환난상휼(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란 4가지 덕목을 널리 퍼트립니다.
3) 현량과 실시
시험을 보지 않고 품성이 좋은 사람을 추천하여 관리로 쓰자는 건의를 합니다. 이에 따라 '현량과'라는 추천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른 뒤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를 실시하게 됩니다. 1519년, 120명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시험을 치르고 28명의 합격자를 선발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사림파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근무하며 여론을 장학하기 시작했습니다.
4) 소학 강조
조광조는 이상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왕이 몸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왕의 교육과 강연을 강조합니다. 이제 중종은 조광조의 말에 따라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특히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학]에 대한 공부를 강조합니다. 소학은 8세의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도덕책입니다. 중종은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학문을 강조하는 조광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추후 조광조를 몰아낸 후, 중종은 소학을 금서로 정하게 됩니다. (기묘사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3. 기묘사화로 버림받은 조광조
중종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부라는 게 하루이틀 열심히 하기는 쉬워도 꾸준히 열심히 하기는 힘듭니다. 그렇게 점점 조광조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서서히 식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훈구파 세력은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현량과로 인해 다수의 사림파 학자들이 삼사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훈구파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위훈삭제'라고 해서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공훈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유는 조금이라도 반정에 연관된 많은 훈구파들이 한 일도 없이 재산과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던 와중, 훈구파 세력은 '주초위왕'이라고 쓰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주는 일이 생깁니다. '주초위왕'이란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반정에 더욱 예민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중종은 훈구파가 들고 온 나뭇잎 하나만으로 조광조를 몰아내버립니다. 그렇게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기묘년에 일어난 사림파의 화라 '기묘사화'라고 불리게 됩니다.
마무리
조광조의 개혁에는 너무 급진적이라는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재위기간이 38년이나 되는 중종이지만, 후손들은 왕보다 조광조를 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왕의 업적보다 조광조의 업적이 더 위대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조광조를 보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성급한 개혁은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추진할 때는 항상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해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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